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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4일 등록문화재 제359호로 지정되었다. 유엔기념공원(UNMCK)은 1951년 유엔군(United Nations Forces:국제연합군)

사령부가 6·25전쟁 당시 한국에 파병되었던 유엔군 전몰장병들의 유해를 안장하기 위하여 재한유엔기념공원으로 조성한 유엔군 묘지이다.

 

 

 

 

정문 입구

 

 

 

 

 

이곳에는 유엔이 1964년에 건축한 기념 예배당과 전시실, 부속건물 등이 있다. 이 중 예배당은 한국 건축가 김중업이 세계 각국 용사들의 종교를

고려하여 현대적이고 독특한 방식으로 설계하였다. 그밖에 한국에서 전사하였으나 무덤이 없는 영국연방군 386명의 용사를 추모하는 기념탑과 UN군

참전기념탑이 있다. 묘지 내의 초목은 대부분 각국 정부, 각 기관과 개인이 기증한 것이다. 무덤마다 고인의 기록을 담은 묘비가 놓여 있다.  

 

 

 

 

 

 

 

 

한국에서 전사한 터키 참전 용사여 6.25 전쟁당시 1만5000여 명을 한국에 파병 했든 터키의 잠전용사 우리들은 형제국이라 합니다.

 

 

 

 

 

부산에 오시면 꼭 방문 하셨으면 합니다.

 

 

유일한 성지에서 40.896명 모든 병사의 희생은 그들 어머니에겐 아직도 고통이고 슬픔입니다.

 

 

 

 

 

 

 

 

 

 

 

 

 

 

 

 

 

 

 

 

 

 

 

 

 

 

 

 

 

 

 

 

 

 

 

 

 

 

 

 

 

 

 

 

 

형 따라 묻히는 동생 - 형 그리며 살던 동생은 작년 "형 옆에 묻히고 싶다" 유언…
25일 부산 UN기념공원서 61년 만에 '형제 유해 상봉'

형은 6·25전쟁에 참전한 동생이 걱정돼 뒤따라 입대했다. 동생은 전장(戰場)을 헤매다 총상을 입고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형과 뒤늦게 재회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이 아니다. 캐나다의 6·25 참전용사 조지프 허시(Joseph Hearsey)와 아치볼드(Archibald) 허시 형제의 실화(實話)다.
61년 전 부산 UN기념공원에 안장된 형 조지프씨를 만나기 위해 동생 아치볼드씨의 유해가 오는 22일 한국에 온다. 형 곁에서 영면(永眠)에 들기 위해서다.
형제는
캐나다 온타리오주(州)의 작은 마을 이그나스(Ignace)에서 태어났다. 조지프는 7남매 중 장남이었고, 아치볼드는 한 살 터울의 차남이었다.

동생은 21살 되던 1950년 9월 7일 6·25전쟁 참전을 위해 입대했다. 그는 가족들에게 "전쟁은 끔찍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그게 옳은 일이었다" 

형 조지프는 동생이 걱정돼 다니던 철도 회사를 그만두고 1951년 1월 6일 입대해 한국 땅을 밟았다.

형은 동생이 있는 프린 세스 패트리셔 경보병연대에 배치됐다.

 

지난 2002년 7월 동생 아치볼드 허시씨가 부인과 함께 6·25에 참전해 숨진 형 조지프 허시씨의 사진을 꺼내 보고 있다(왼쪽 큰 사진). 부산 UN기념공원에 있는 조지프 허시의 묘(오른쪽 위). 6·25 참전 당시 동생 아치볼드씨 모습(오른쪽 아래). /캐나다 일간지 'The Chronicle Journal' 제공

영연방 27여단과 함께 작전을 펼쳐 여주 전투 등에서 큰 성과를 거둔 부대였다.

형제는 같은 연대에 있었지만 계속되는 전투 속에 만나지 못했다.

1951년 10월 13일 동생은 북한군과의 격렬한 교전 직후 참호 정비에 나섰다. 근처 참호에 있던 전우들이 "너와 이름이 같은 병사가 쓰러져 있어"라고 외쳤다. 그곳에 캐나다에 있을 줄 알았던 형 조지프가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된 채 고꾸라져 있었다. 어딘가를 응시하던 형은 동생 품에서 곧 숨을 거뒀다. 동생은 형의 주검이 담요에 말린 채 다른 전사자 시신 옆에 놓이는 것을 지켜봤다. 아치볼드씨는 "그때야 형이 나를 보호하려고 참전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형은 1951년 10월 부산 UN기념공원에 안장됐다.

동생은 전쟁이 끝나자 형의 유일한 유품인 파란색 실크 파자마를 들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형이 귀향할 때 어머니에게 주려고 사 놓았던 선물이었다. 어머니는 죽는 순간까지 파자마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고 한다.

아치볼드는 1955년 명예 제대를 했다. 부인 아그네스(Agnes)를 만나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뤘지만 시간이 흘러도 전쟁으로 생긴 가슴 속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다. 어둔 밤에 소리를 지르고, 숨진 형의 사진을 보며 우는 날이 많았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게 된 것이다.

아치볼드의 외동딸 데비(Debbie)씨는 "아버지는 제가 성인이 된 뒤 6·25전쟁 경험담을 들려주기 시작했다"며 "그때야 아버지 손이 왜 항상

검푸른 피멍 투성이였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아치볼드는 "적에게 둘러싸인 형을 보호하려고 주먹질을 하는 꿈을 자주 꿨는데,

그때마다 깨어보면 침대 옆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치볼드는 형의 묘지를 찾기 위해 한국에 오고 싶었지만 가난했다.

참전용사에게 한국 방문 기회를 주는 UN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폐질환에 걸려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없게 된 뒤였다.

자기 대신 2009년 11월 방한한 딸이 찍어온 형의 묘 사진을 보는 것으로 그리움을 달랬다.


 

 

 

 

 

 

 

 

 

 

 

한국인은 6·25전쟁 당시 카투사로 참전한 전사들 입니다.

 

 

 

 

 

 

 

 

 

 

 

 

 

 

 

 

 

 

 

 

 

 

 

 

 

 

1955년 유엔총회에서 ‘유엔기념묘지’로 지명한 세계 유일의 묘지로서, 세계평화 유지를 위한 국제협력정신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하는

상징적 의미가 큰 유적이다. 1974년 2월 16일 이후 이곳에 전사자의 유해를 봉안한 11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

위원회(Commission for the UNMCK)가 관리하고 있다. 사무소는 묘지공원 안에 있으며 건물은 UN이 관장하여 1968년에 건축하였다.   

 

 

 

 

 

 

 

 

 

 

 

유엔군 사령부는 개성, 인천, 대전, 마산 등지에 흩어져 있던 유해를 이곳으로 이장하여 안치하였다. 처음에는 미국, 벨기에, 프랑스,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그리스, 인도, 필리핀, 타이 등의 11,000위가 봉안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자국으로 송환되고 현재는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터키, 미국, 영국 등 11개국의 2,300여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현재 유엔기념공원에는 11개국의 전사자 2.300명이 잠들어 있다.

국가별로 보면 영국 885, 터키 462, 캐나다 378, 호주 281, 네덜란드 117, 프랑스 44, 미국 36, 대한민국 36, 뉴질랜드 34, 남아공 11,

노르웨이 1명 순이다. 한국인은 6·25전쟁 당시 카투사로 참전한 사람들이다. 미군은 본인이 종전 후 유엔기념공원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해 묻혔다

 

 

 

 

 

 

 

 

6·25 참전용사 후손들, 한국 특전사서 병영체험

6·25전쟁 참전용사 3세대 후손인 외국인 여학생이 지상 낙하산 훈련을 받기 위해 장비를 착용하며 웃고 있다. /이준헌 기자 heon@chosun.com

"할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전할 수 있었다는 게 영광스럽고

할아버지의 참전을 감사하게 여기는 한국 분들께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13일 서울 송파구 거여동 특전사령부 3여단 사령부에서 실시된 'UN 참전국
청소년

평화캠프 병영체험' 행사에 참가한 캐나다 대학생 엘리자베스 모건 그레이(여·21)씨는 이같이 말했다

그레이씨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지난 8일부터 진행 중인 이 평화캠프에 참가한 15개국 146명의

대학생(국내 10명 포함) 중 한 명이다. 이들은 6·25전쟁 참전용사 3세대 후손들이다.

그레이씨는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찍었던 사진과 편지들을 묶어 기념책을 만들었는데

한국전쟁기념관에 기증하기로 했다"며 "그 책에는 다른 참전용사 할아버지들의 편지도 있어

한국전쟁 당시 일어난 일들을 역사적으로 증명해주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병영체험은 UN 참전국 청소년 평화캠프가 2009년 시작된 이후 처음 실시됐다.

참가 대학생들은 공수지상훈련(낙하산 훈련)과 레펠훈련(밧줄 타고 내려오기) 등을 받았다.

그동안 UN참전국 청소년 평화캠프는 대체로 평화를 주제로 한 자전거 대행진, 평화세미나

한국 전통문화 이해, 한류 현장 체험, DMZ 및 제3 땅굴 등 안보현장 견학, UN 기념공원 참배로 진행됐다

하지만 금년의 경우 특전사 병영체험 외에 국립서울현충원 참배, 국내 6·25전쟁 참전용사 묘비 닦기 등

UN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마련됐다.

 

 

 

 

 

◆2012/07/17(화) -얼마나 더 살아야 하나- (1539)

 

6.25는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고 우겨대는 자들, 6.25 사변 때 유엔군 참전은 크게 잘못된 일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 그 사변에서 국군이 패망하고 인민군이 승리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 이런 자들과 얼마나 더 오래 대한민국의 하늘 밑에서 함께 살아야 하나?

KAL기를 폭파시킨 김현희는 북의 공작원이 아니라 남쪽의 중앙정보부의 첩자라고 떠드는 자들, 이런 한심한 인간들과 우리는 얼마나 더 여기서 같이 살아야 하나?

마치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쓰러져 죽는다고 허위 선전하던 염치없는 놈들, 이런 얼간망둥이들과 우리는 언제까지 한 솥의 밥을 먹으면서 함께 살아야 하나?

천안함 폭침은 북의 소행이 아니고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은 즉시 중단해야 하며, 미국과의 FTA 체결은 매국적 처사라고 핏대를 올리는 이런 미친놈들과 우리는 언제까지 대한민국에서 같이 살아야 합니까.

태극기보다는 인공기를 택하고, 애국가 제창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이런 민족반역자들에게도 주민등록증을 발급하는 이 대한민국이 정신이 있는 나라입니까, 없는 나라입니까? 이명박 대통령의 ‘중도실용주의’의 내용이 고작 이런 겁니까. 피와 땀으로 가꾸어온 이 위대한 대한민국이 이 꼴이 되는 것을 수수방관, 보고만 있을 겁니까? 오호통재, 오호통재! 이 이상은 저 놈들과 같이 살 수 없습니다.

김동길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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