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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비극

유엔 용사에게 바치는 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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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오지않은 산속에 바람과 뻐꾸기만 웁니다

바람과 뻐꾸기 소리로 각종 꽃만 피어납니다

이곳에 오며 수만 마디의 말들은 사라지고 사랑한다는 오직 그 한마디 깃발처름 나를 흔듭니다

세상에 서로 헤어져 사는 많은 이들이 많지만 정녕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이별이 아니라 그리움 입니다.

 

각종의 꽃-시민공원과 유엔묘지에서 일부 담았습니다.

 

 

 

 

 

 

 

 

 

 

 

 

 

 

 

 

 

 

 

 

 

 

 

 

 

 

 

 

 

 

 

 

 

 

 

 

 

 

 

 

 

 

 

 

 

 

 

 

 

 

 

 

 

 

 

 

 

 

 

 

 

 

 

 

 

 

 

 

 

 

 

 

 

 

 

 

 

 

 

 

 

 

 

 

 

 

 

 

 

 

 

 

 

 

 

 

 

 

 

 

 

 

 

 

 

 

 

 

 

 

 

 

 

 

 

 

 

 

 

 

 

 

 

 

 

 

 

 

 

 

 

 

 

 

 

 

 

 

군 전몰장병 추모명비의 미군 전사자 3만6492명의 명단.
추모명비에 4만896명 이름 새겨져
유엔군 전사자는 4만896명. 이 숫자는 아무런 파토스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본다는 것은 전혀 느낌이 다르다.
유엔군 전몰 장병 추모명비에는 한반도에서 공산 침략에 맞서 자유 대한을 지키다 숨진
이들의 4만89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름을 적은 패널은 1번부터 140번까지.
전사자 명단의 이름 옆에는 다이아몬드 표시나 원 표시가 있다. 다이아몬드 표시는 유해가
유엔기념공원에 있다는 뜻이다. 원 표시는 본국으로 봉환됐거나 실종됐다는 의미다.
이 중 미군 명단은 21번 패널부터 140번까지다. 미국은 전사자 수(3만6492명)가 가장 많아
주별로 분류했다. 기자는 맨 먼저 나오는 앨라배마주부터 보다가 금방 그 숫자 세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벽면의 전사자 이름이 끝이 없었다. 말 없이 한국 땅에 이름으로만 남은 이들.
침묵의 벽면을 지켜보노라니 까닭 모를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가슴속에서 올라왔다.
영국군 참전 용사 제임스 그룬디(80)는 1951년 2월부터 1953년 6월까지 참전했다.
그의 주 업무는 시신 수습. 수많은 전우들의 죽음을 수습해 이국땅에 묻었다.
그룬디는 1988년 참전 용사 100여명과 유엔기념공원을 찾은 이래 매년 한 번씩 이곳을
찾아 말 없는 전우들을 만난다. 지난 4월 28일에도 한국에 왔다. 말기암 환자인 그의 소망은 하나.
유엔기념공원의 옛 전우들 곁에 묻히는 것이다. 한국전 전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규정상
그룬디씨는 이곳에 묻힐 수가 없다.
유엔기념공원 박은정 홍보과장은 “그룬디씨는 묘비도 필요 없고 유분을 뿌려만 달라는 것
이라며 그룬디씨의 소망이 꼭 이뤄지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
유엔기념공원은 묘와 묘 사이에 장미와 영산홍을 번갈아 가며 심어놓았다.

 

 

 

 

40,896명 모든 병사의 희생은 그들 어머니에겐

아직도 고통이고 슬픔이다
유엔기념공원 주묘역에서 본 상징구역. 유엔기를 포함해 21개 참전국의 국기가 휘날리고 있다.

부산 유엔기념공원 60년 悲歌

연분홍 꽃잎이 분분히 흩날리고 있었다. 길과 풀밭 위에 떨어진 꽃잎들은 강물이 잔바람에

헤적이듯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배꽃이 지기를 기다렸다 핀다는 왕겹벚꽃나무.

공원을 찾은 사람들은 연분홍 꽃잎을 지르밟으며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을 찾아가고 있었다.

4월 말의 부산 유엔기념공원 풍경이다. 

기자가 부산 유엔기념공원(UNMCK)을 가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지난 4월 23일자 조선일보 1면은 노란색 우비를 입은 채 옛 전우의 묘비 앞에 고개를

숙인 노병(老兵)들의 사진을 실었다. 사진 설명은 ‘영연방 참전 용사 230명이 가평

전투 60주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했다’고 되어 있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이런 의문이 들었다.

무엇이 노신사들을 부산까지 오게 했을까. 호주와 캐나다에서 한국의 부산까지 오려면

비행기만 최소 10~14시간을 타야 하는데. 

지난 4월 27일 오전 10시 유엔기념공원을 찾았다. 공원을 둘러보는

코스는 추모관→상징구역→주묘역→유엔군전몰장병추모명비→유엔군위령탑→

무명용사의 길→돈트 수로→기념관 순이다.

자원봉사 안내원 최구식씨의 안내를 받으며 이 코스대로 움직였다.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추모관에서 15분짜리 ‘브리핑 필름’을 보았다. 6·25전쟁의 발발,

유엔군의 참전, 유엔군의 희생 그리고 기념공원의 조성에 관한 내용이다.

6·25전쟁 3년간 유엔군은 4만896명이 숨졌다. 유엔기념공원은 1951년 4월 조성됐다.

꼭 60주년이 됐다. 현재 유엔기념공원에는 11개국의 전사자 2300명이 안장돼 있다.

 기자는 이 동영상에서 뜻밖의 구절을 접하곤 가슴이 짠했다.

“모든 병사에게는 어머니가 있다. 아들의 희생은 어머니에게 아직도 고통과 슬픔이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이 땅에 피를 뿌린 유엔군 병사들. 어리석게도, 기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병사들의 죽음을 어머니와 연결시켜 생각하지 못했다. 어머니…. 그랬다.

그들은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었고, 어여쁜 소녀의 애인이었다.

터키군 참전비, 프랑스군 참전비(중간 위), 그리스군 참전비(중간 아래), 노르웨이군 참전비, 필리핀군 참전비(좌로부터)

낙동강 전투에서 스러진 젊음들
추모관에서 나와 검은색 대리석 문을 통해 망자(亡者)의 세계인 묘역으로 들어섰다.

묘역의 맨 위쪽에는 상징구역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 이르는 길은 아주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참배객들은 왼편으로 도열한 왕겹벚꽃나무를 사열하며 올라간다.

상징구역에 들어서자 뜻밖에도 한국인 이름의 묘비가 보였다. 하나, 둘, 셋…. 모두 36기였다.

미군에 배속돼 이들을 지원하는 한국 군인 카투사로 참전한 이들이었다.

왼편 모퉁이에 일병 홍옥봉의 묘가 보였다. 홍옥봉 일병은 1950년 9월 10일 전사했다.

전사 장소는 경남 창녕군. 홍옥봉 일병의 묘는 다른 35기의 묘비와는 다른 게 있었다. 합장묘였다.

아내 박봉금씨가 2002년 8월 1일 남편 곁에 묻혔다. 꽃다운 나이에 청상(靑孀)이 된 새색시는 52년간 남편을 그리워 하다가 죽어서야 남편 곁으로 갔다는 이야기 아닌가. 전쟁이 앗아간 남편을

 잊지 못해 남몰래 베갯잇을 적셨을 그 수많은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정삼문 병사를 비롯한 다른 병사들의 묘비를 하나씩 훑어 내려갔다. 놀랍게도 전사 장소가 창녕과

영산에 집중돼 있었다. 경남 창녕군 영산면은 낙동강을 끼고 있다.

저 유명한 자연습지 우포늪이 창녕군에 있다.

다시 전사 일시를 확인해 나갔다. 8월에 전사한 김주리 일병을 제외한 35명이

모두 9월 2~10일에 전사했다. 이 중에서 9월 3일에 전사한 사람이 11명이었다. 창녕과 영산,

낙동강이라는 고유명사만 듣고 금방 6·25전쟁의 한 장면을 떠올린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전쟁 초기의 가장 치열했던 한 장면이 낙동강 방어선. 카투사 36명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 공산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위험에 빠진 조국을 지키다 그렇게

청춘의 꽃봉오리가 꺾인 것이다.

유엔군이 인천 앞바다를 통해 상륙한 게 9월 15일. 속수무책으로 패퇴를 거듭하던 전세를

일시에 뒤바꾼 게 인천상륙작전이다. 일주일에서 보름만 견뎌냈다면 카투사 35명은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한 장면과 조우하게

될 줄은 몰랐다. 6.25전쟁 당시 참전국은 전투병 파병국 16개국과 의료 지원단 파견 5개국을

합쳐 모두 21개국. 이 중 17개국의 병사들이 전사했다. 상징구역에는 참전국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가장 먼저 만나는 기념비가 그리스 참전 기념비. 이어 필리핀, 태국, 터키,

콜롬비아, 뉴질랜드, 노르웨이 등.
뉴질랜드군 참전비, 영국군 참전비, 호주군 참전비, 캐나다군 참전기념동상 (좌로부터)

고국의 흙 한 줌 옆에 놓고
유엔기념공원에서는 매일 오전 10시 알파벳 순서대로 국기 게양식을 연다. 매월 2·4주 토요일

오후 2시에는 53사단 소속 군악대가 알파벳 순서대로 국기 게양식에 맞춰 해당 국가의

국가(國歌)를 연주한다. 노르웨이는 전투병을 보내지 않고 의료 지원단만 보냈으나

3명이 전사했고, 이 중 한 명이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돼 있다. 2007년

하콘 마그누스 노르웨이 왕세자 부처가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했다.

터키는 21개 참전국 중 유일한 이슬람 국가. 터키 병사 462명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터키 정부는 기념비에 시(詩)를 새겨놓았다. 터키 국기가 걸린 게양대 밑부분에 유리 상자가

놓여 있었다. 터키의 성지(聖地)에서 퍼온 흙이 담겨 있는 통이 여러 개 보였다. 무슬림들은

종교적 관습에 따라 나라의 부름을 받아 대의를 위해 싸운 나라를 조국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육신은 그 나라에 잠들어 있지만 혼은 자신이 태어난 조국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1973년 10월, 콜롬비아 국방장관은 스페인어와 한국어를 나란히 적은 묘비를 세웠다.

자유를 위한 콜롬비아 사람의 죽음은 그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상징구역에 있는 기념 조형물 중 미학적으로 눈길을 끄는 것은 뉴질랜드 기념탑. 한눈에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문양이 직사각형 석판에 새겨져 있다. 모코(Moko). 모코는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 여성의 턱 문신으로, 성인을 상징한다. 옆에는 기념탑에 대한 한글 설명이 보였다.

“…이 디자인은 전시에 국가를 위해 복무했던 모든 이들의 어머니로서의 뉴질랜드를 나타내며,

 또 양옆으로 흘러내리는 물길로 육군과 해군이 밑에서 유엔과 합쳐지는 것을 보여준다.

 기념비의 측면을 따라서 45개의 파인 자국들이 있다. 이것 하나 하나는 한국전쟁 중 전사한

 군인들에 대한 뉴질랜드의 상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찰리 그린 묘와 아내 올윈 그린의 책.

안장자 영국이 가장 많아
영연방 국가 중 안장자 순으로 보면 영국 885명, 캐나다 378명, 호주 281명, 뉴질랜드 34명,

남아공 11명이다. 미국은 전사자 대부분의 유해를 본국으로 봉환했다. 영국, 캐나다,

호주는 워낙 전사자 수가 많다 보니 주묘역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영국은 자국 병사들의 묘역 맨 앞에 앉아 있는 사자 동상을 세워놓았다.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에도 넬슨 동상의 기단부에 네 마리의 앉아 있는 사자가 사방을 주시하고 있다.

캐나다는 동상을 세워놓았다. 무장을 하지 않은 군인이 서 있다. 군인은 오른팔로 소녀를 안고 

왼손을 소년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소녀의 조막만한 손에는 단풍 잎사귀 10개가 들려 있고,

소년도 단풍잎 11개를 들고 있다. 그런데 소년이 들고 있는 잎사귀 가운데 무궁화꽃

잎사귀가 보였다. 모두 세어보니 21개. 단풍잎과 무궁화꽃이 각각 21개였다.

‘21’은 캐나다군 전사자 516명 중 유해를 찾지 못해 조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유엔기념공원에도 안장되지 못한 실종자 숫자였다. 동상 기단부에는 영어와 한글로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는 캐나다의 용감한 사람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호주 역시 특별한 참전비를 세워놓았다. 기념비의 전면(前面)이 비바람을 맞지 않도록 굴처럼

만들었다. 뒷면에는 호주 군인들의 전투 상황도를 한반도 지도와 함께 아예 동판으로 새겼다.

그리고 ‘호주와 한국전쟁’이라는 글을 새겨놓았다.

“1950년 6월, 호주는 북한의 남한 침공을 방어하기 위한 유엔의 호소에 최초로 응대한 국가 중

하나였다. 호주군은 한국전쟁의 지상, 해상, 공중전에 참가했으며 그중에서도 가평,

마량산 및 37도선 주변의 전투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 1950년 9월 이후 지연전을

포함한 치열한 지상전에서 크게 활약했다.…호주군의 희생은 한국 국민에게 자유 수호의

상징으로 기억될 것이며, 이는 양국 간의 밀접한 사회·경제·교육 교류로 길이 보전될 것이다.” 
홍옥봉, 휴머스턴, 헤론 병사의 합장묘.(위로부터)

“남편 곁에 묻히고 싶다”
주묘역에는 합장묘 3기가 있다. 영국군 병사 J T 헤론. 1951년 11월 16일 전사했다.

부인 엘렌 헤론은 2001년 1월 10일 86세로 사망해 한국에 누워 있는 남편 곁에 합장됐다.

엘렌 헤론은 50년간 남편을 잊지 못하다가 소원대로 남편 곁에 묻혔다.

헤론 부부 이야기는 공산 침략으로 시작된 6·25전쟁이 얼마나 많은 인생을 파괴했는지를 보여준다. 헤론은 1940년에 입대했다. 같은 부대에서 이병 엘렌을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헤론은 버마(미얀마) 전선에 나가 일본군과 싸웠다. 비록 전투 중 한쪽

눈을 잃었지만 목숨을 건졌기에 실명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종전 후 헤론은 모처럼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 자녀는 네 명으로 늘었다.

6·25전쟁이 터지면서 헤론은 다시 나라의 부름을 받고 최전선에 나섰다. 1951년 9월,

헤론은 14일간의 달콤한 휴가를 얻어 고향 노폭으로 돌아가 가족과 재회했다. 헤론이 다시

한국에 돌아온 것은 10월 1일. 그러나 11월 6일 전사한다.

고향에서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들은 엘렌은 실신했고 이후 오랜 세월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그 사이 돌봐줄 사람이 없던 4남매는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엘렌은 그 후 두 명의 남자와 만나

생활을 했으나 행복하지 않았다. 엘렌은 1984년, 70세 나이에 처음으로 남편의 무덤을 찾아와

목 놓아 흐느꼈다. 이후 엘렌은 자녀들에게 “내가 죽으면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수없이 했다. 그녀가 남긴 유일한 유언이었다. 마침내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한 2001년

그토록 그리던 남편과 부산에서 만났다. 

지난해 4월 14일에도 6·25 참전 용사와 유가족 200여명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유골 합장식을 열었다.

호주군 대위 케네스 휴머스턴은 1950년 10월 3일, 34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그의 아내는

낸시 휴머스턴. 남편을 이역만리에서 잃고 난 후 낸시는 61년을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지만 낸시는 남편을 잊지 못했다. 낸시 휴머스턴은 2009년 10월,

91세의 나이로 숨졌다. 낸시는 생전에 작성한 유언장에 “사후에 한국의 유엔기념공원에 잠든

남편과 함께 있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최연소 전사자는 17세 호주군 존 셰퍼드.

그의 부인 메리 셰퍼드는 간호장교.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조국의 부름을 받고 자유를

위해 참전했다. 셰퍼드는 아내의 뱃속에 아이가 있는 줄 모른 채 전선에 나갔다. 셰퍼드는

1951년 2월 15일 전사했다. 그의 나이 서른한 살. 딸은 아버지가 숨진 직후 태어났다. 유복자!

여인은 딸을 키우며 평생 혼자 살았다. 2005년에 합장했다.

유엔기념공원에 합장이 드문 것은 당연하다. 전사자들의 대다수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사했기 때문이다. 박은정 유엔기념공원 홍보과장은 “결혼을 한 전사자는 부인이 재혼하는

경우도 있고 해서 부부가 합장하는 사례는 드물다”고 말했다.

유엔군 전사자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가 많았다. 최연소 전사자는 호주군

연대 3대대의 J P 돈트 일병. 1951년 11월 6일 전사한 그의 나이는 17세.

한국의 고등학교 1학년생나이. 유엔군기념공원 측은 돈트를 잊지 않기 위해 수로(水路)를 조성했다.

돈트(Daunt)수로. 주묘역이 끝나는 부분에 있는 약 40㎝폭의 수로다. 생과 사의 경계를

뜻하는 의미라는 게 기념공원 측의 설명이다.   

공원 내 제2기념관에는 수많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안장자의 유가족들이 보내온 고인의

사진을 비롯한 유품들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들은 모두 지구가 무너지는 슬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기자는 전시관 중앙에 전시돼 있는 책자를 보면서 한동안 발에 납덩어리가

붙은 듯 꼼짝을 하지 못했다. 영문 책의 제목은 ‘그의 이름은 여전히 찰리(The Name’s still Charlie)’,

저자는 부인인 올윈 그린(Olwyn Green). 1923년생인 부인이,

한국전쟁에서 1950년 11월 1일 전사한 남편과 전몰 용사를 추모하기 위해 1993년에

출판한 책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 책의 286~ 287쪽이 한글로 번역돼 있었다.

그중 일부를 옮겨본다.

“(찰리의 죽음을 전해들은) 나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아무리 울어도

그 슬픔을 극복할 수가 없었다.…나는 찰리의 마지막 순간을 알고 싶었다. 평화롭게,

모든 것을 용서하면서, 그리고 여전히 나를 사랑하면서 죽어갔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편지와 전보가 맥아더 장군을 포함해 도처에서 왔다.

그땐 그런 모든 추모의 전갈들이 무의미하게 보였다. 나는 단지 그와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돈트 수로

신원 확인 안 된 전사자 위한 ‘무명 용사의 길’
유엔기념공원 측은 2006년부터 365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사자들의 제사를 챙기고 있다.

물론 제례 용품을 묘비에 놓지는 않는다. 기일이 돌아온 전사자들의 묘비 앞에 국기를 꽂고

국화꽃 한 송이를 꽂아 놓는다.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제사가 돌아온 전사자들의 이름과 계급을 올려놓고 추모한다.

4월 27일에는 캐나다 군인, 터키 군인,

그리고 이름이 확인되지 않은 영국 병사가 기일을 맞았다.

1951년 4월 23~24일은 경기도 가평에서 영연방군이 중공군 5000명과 맞서 물리친 날.

당연히 이틀 동안 수많은 영연방군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날은 주묘역에 온통 영국 국기,

캐나다 국기, 호주 국기, 뉴질랜드 국기가 나부낀다.    

참전국 정부 입장에서 가장 비통한 것은 전사한 장병의 유해를 수습하지 못한 경우다.

유엔군의 깃발 아래 참전했다가 전사한 이는 4만896명. 이 중 영연방군 소속으로 유해를

수습하지 못한 경우는 403명. 기념공원 측은 위령탑에 실종자 403명의 이름을 국가와 소속

부대별로 기록해 놓았다. 또한 유해는 찾았지만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무명 용사의 길 을 조성했다. 각각 11개의 계단을 만들고 그 위로 물이 흐르게 했다.

양옆에는 각각 11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 참전국 21개국과 한국을 기념하는 숫자다.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의 미군 전사자 3만6492명의 명단.

추모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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