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비
아침부터 잔 비 머리를 적시고 먼길 가던 새 몇 마리
느닷없는 총성에 떨어진 외딴 늪처럼 가슴에 혼란한 물무늬
만들며 육신 흔들어도 절망은 지나가는 비
온 세상 뒤덮을 듯 검은 구름 하늘 끝에서 하늘 끝을
건너 밀려가다가도 구름을 찢고 간간이 드러나는 빗살의
여린 얼굴 다시 있어 절망도 언젠가는 지나가는 비
밤새 마을은 홍수에 잠기고 너를 잃은 마음 물가운데 뜬
몇 개의 지붕처럼 황망하다가도 물 빠진 뒤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저 논밭과 신작로처럼 젖어 있는 우리의 생애도
언젠가는 물이 빠지리니
지금 외로운 나 하나 비 젖은 채 황랑한 들 가운데 있지만
물줄기를 앞질러가는 세월 속에 절망도 언제가는 지나가는 비
도종환의 시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