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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ay - Elvis Presley

자, 이제 마지막이 가까워 졌군 내 생의 마지막 순간을 대하고 있어
친구, 분명히 해두고 싶은게 있어 내가 확신하는 바대로 살았던
삶의 방식을 얘기해 볼께 난 충만한 삶을 살았고,
정말 많은 것을 경험하며 돌아 다녔지만,
그 보다 훨씬 더 굉장했던 것은 난 항상 내 방식대로 살았다는 거야

후회라... 꽤 있었지 그렇지만 달리 보니,
끄집어내어 이야기할 정도로 았던 것은 아냐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었고,
한치도 예외없이 그것을 끝까지 해냈지 난 계획된 길을 따라가기도 했고,
샛길을 따라 조심스러운 걸음도 계획했었어 그리고.그 보다 더 가치있었던 것은
난 항상 내 방식대로 살았다는 거야

그래 맞아,자네도 잘 알겠지만,어떤 때는 지나치게 과욕을 부린 적도 있었지.
하지만 그런 모든 일을 겪는 도중,의심이 생길 땐 전적으로 신용했다가도,
딱 잘라 말하기도 서슴치 않았어 모든 것과 정면으로 맞서면서도,
난 당당했고, 내 방식대로 해냈던 거야 사랑도 해봤고,웃기도, 울기도 했었지.
가질 만큼 가져도 봤고 잃을 만큼 읽어도 봤지.이제, 눈물이 가신 뒤에 보니,
모두 즐거운 추억일 뿐이야 내가 했던 모든 걸 생각하니,부끄러워 하지 않는 투로
이렇게 말해도 되겠지.아뇨, 무슨 말씀을, 난 달라요.난 내 방식대로 살았어요 라고

사나이가 사는 이유가 뭐고,가진 것이 과연 뭐겠어?
그 자신의 주체성이 없다면,가진게 아무 것도 없는거지
비굴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자신이 진실로 느끼는 것을 말하는게
진정 남자 아니겠어 내 경력이 말해주고 있듯이 난 어려움! 을 피하지 않았고
항상 내 방식대로 해결했어 그래, 그건 나만의 방식이었어.

 

후랑커 시나트라의 일생의 삶의 노래 였지만 고인 프레스리가 슬픈 음감으로 올렸습니다

에리자베스 테일러 에게 바치면서 노후에 봉사와 파란 만장한 사생활과 좋은 일도 많이 하였다 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편이 잠드소서  

                          1932.2.27~2011.3.23… 엘리자베스 테일러 사망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두차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삼가 故人의 명복을 빕니다.

 

 

그는 아름다움이었다. 때론 하얀 순수(純粹)였고 때론 붉은 정염(情炎)이었다. 그는 사랑이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시대를 초월한 세기의 여신(女神). 그가 23일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하늘로.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한 햇수는 79년.

 

1948년 미국 라이프지 표지모델로 등장한 16살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데뷔한 지 6년째 되던 해이다. /매그넘포토

2004년부터 앓아온 울혈성 심부전증이 결국 그를 우리로부터 떼놓고 말았다. 2009년 수술 뒤 "새로운 심장이 몸속에서 뛰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라며 삶을 기뻐하더니 결국 하늘의 부름을 뿌리치지 못했다.

1932년
영국 런던 햄스테드 출생. 1939년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1944년 영화 '녹원의 천사'로 아역 스타가 됐다. 이후 1960년과 1966년 두 차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7명의 남자와 8번 결혼한 사생활이 화젯거리였다. 노년에는 에이즈 퇴치 등 사회활동에 힘을 쏟았다. 이제 은막의 여제에게 할 말은 이것뿐. "굿바이 리즈!"

 

사람들은 그것을 '남성 편력(遍歷)'이라고 했다. 그러나 본인에겐 사랑을 찾기 위한 여정(旅程)일 따름이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결혼사(史), 리즈의 남자들 이야기다.

'
영국의 장미'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7명의 남자와 8번 결혼하고 이혼했다. 리처드 버튼(Burton)과는 두 번 결혼했고 두 번 모두 이혼했다. 버튼은 테일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관계는 지구와 금성만큼이나 멀다"고 했지만 테일러는 "가장 사랑했던 남자"로 버튼을 꼽았다.

테일러는 버튼을 만나기 전 네 번 결혼했다. 18살 때인 1950년 힐튼 호텔 창업자의 아들인 콘래드 힐튼(Hilton)과 첫 결혼식을 올렸다. 힐튼의 알코올 중독과 가정 폭력 때문에 이듬해 바로 헤어졌다. 두 번째 연인은 영국 배우 마이클 윌딩(Wildling). 1952년 결혼식을 올리고 아들 둘을 낳았다. 그러나 1957년 이혼했고 한 달 만에 영화 제작자인 마이클 토드(Todd)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1958년 딸을 낳자마자 토드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리즈는 이듬해 고인이 된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수인 에디 피셔(Fisher)와 결혼식을 올렸다. 6년 가까이 이어지던 결혼 생활은 버튼 때문에 끝이 났다. 둘 다 기혼자면서 영화 '클레오파트라'(1963)에 함께 출연한 것을 계기로 사랑에 빠졌다. 마침내 1964년 3월 6일 테일러는 피셔와 이혼하고 10여일 만에 버튼과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로 지내는 동안 10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했고 10년간 살다가 버튼의 알코올 중독 문제로 1974년 헤어졌다. 이혼한 지 14개월 뒤 이들은 다시 결혼했다.

버튼과 헤어진 이후 테일러는 꽤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해나갔다. 1976년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던 존 워너(Warner)와 결혼식을 올렸고 1982년까지 함께했다. 그 이후로 10년 가까이 테일러는 결혼하지 않다가 1991년 20세 연하인 공사장 노동자 래리 포텐스키(Fortensky)와 마이클 잭슨(Jackson)의 목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 콘래드 힐튼 주니어 2. 마이클 윌딩 3. 마이클 토드 4. 에디 피셔 5·6.리처드 버튼 7. 존 윌리엄 워너 8. 래리 포텐스키 A. 아르데시 자헤디 B. 젊은 시절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바이올렛 색채의 눈동자가 감겼다. ‘20세기 최고의 미인’이 하늘의 별이 된 것이다.

현대의 클레오파트라로 불리며 할리우드 황금기를 꽃피운 미국 유명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23일 타계했다. 향년 79세.

리즈(엘리자베스의 애칭)의 홍보담당사는 이날 성명을 내고 “리즈가 로스앤젤레스 시더스-사이나이 병원에서 울혈성 심부전증으로 숨졌다”고 발표했다. 리즈는 2004년부터 앓아온 이 병으로 지난달 입원했다.

미국 영화사는 이른바 할리우드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여배우 중 한 명으로 리즈를 꼽는다. 할리우드로 상징되는 미국 영화에 전 세계가 빠져들 때 할리우드는 리즈에게 사로잡혔다. 1960, 70년대 메이저 제작사들의 백가쟁명 속에서 고전적인 스튜디오 제작 시스템이 찬란하게 꽃필 때 리즈는 최고의 여배우였고, 미국 영화가 세계 영화의 대중적인 표준으로 자리 잡던 시기에 맞춰 세기의 연인으로 사랑받았다.

리즈는 1932년 영국 런던에서 미술품 거래상인 아버지와 연극배우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국에서 건너온 리즈의 부모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어머니의 끼를 물려받은 리즈가 연기에 발을 디딘 것은 수려한 외모를 알아본 지인이 카메라 테스트를 권하면서부터. 10세에 데뷔해 12세 때인 1944년 MGM이 제작한 ‘녹원의 천사(National Velvet)’를 통해 스타덤에 올랐다. 소녀는 곧 비평가들과 대중을 모두 숨죽이게 만든 매혹적인 성인 스타로 자라났다.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과 흰 눈처럼 창백한 얼굴, 바이올렛 색채의 눈동자가 어우러진 미모에 구름 같은 팬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리즈는 연기가 아닌 외모에 주목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못미더웠다. 리즈는 훗날 인터뷰에서 “당신이 예쁘다고 생각하나요? 그렇다면 연기를 하려고 노력하는 웨이트리스가 될 뿐이죠. 당신은 절대로 존경받지 못할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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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5월 프랑스 칸국제영화제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에이즈를 퇴치하는 영화’ 행사에 참석해 환호하는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하고 있다. 그는 영화 ‘자이언트’에서 함께 공연한 친구 록 허드슨이 에이즈에 걸리자 1985년 에이즈 퇴치운동을 시작했고 1999년엔 자신의 이름을 딴 에이즈 퇴치 운동 단체를 설립했다. 칸=AFP 연합뉴스

리즈 “나 죽거든 버튼 고향에 뿌려지길…”
총 8번 결혼…리처드 버튼과 두번 결혼·결별
뉴스엘리자베스 테일러는 18살때인 1950년 5월 호텔 재벌인 콘라드 힐튼 2세와 처음 결혼했지만 그해 12월 이혼했다. 이어 1952년에는 영국 영화배우 마이클 와일딩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지만 4년만에 헤어졌다. 1957년에는 영화 제작자인 마이클 토드와 결혼해 딸을 낳았지만 토드는 다음해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졌다.토드가 죽은 뒤 테일러는 토드의 절친한 친구이자 자신의 친구 데비 레널즈의 남편이었던 팝가수 에디 피셔와 염문을 뿌려 화제가 됐다. 테일러는 당시 한 기자에게 “혼자 자란 말이야?”라고 말하기도 했다.테일러와 피셔 부부는 그러나 테일러가 1962년 영화 클레오파트라 촬영장에서 리처드 버튼을 만나면서 파경을 맞게 된다. 테일러는 버튼과 두번의 결혼, 파경으로 인

 

연을 끝냈지만 ”내가 죽으면 버튼의

고향에 뿌려지길 원한다“고 말했다.
이후 해군장관을 지낸
정치인워너와 1976년 결혼했고 1982년 헤어졌고 1991년 20년 연하인 공사장 노동자이자 트럭 운전기사이던 래리 포텐스키와 마이클 잭슨의 목장

에서 결혼식을 치러 화제를 낳기도 했지만 5년만인 1996년 파경을 맞았다. 그리고 지난해 29세 연하남인 할리우드 매니저 제이슨 윈터스와의 약혼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공식 부인했다. 

♪ The Shadow of Your Smile - from Movie 고백(The Sandpiper, 1965)


 


 

 

 

그제 떠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할리우드식 표현으로 '기절할 만큼 예쁜 미인(stunning beauty)'이었다. 1950년대 절정을 달린 배우 중에 매릴린 먼로가 '섹스 심벌', 그레이스 켈리가 '얼음 공주', 오드리 헵번이 '영원한 명랑소녀'였다면, 깊은 보랏빛 눈동자를 지닌 테일러는 그 종합판 같은 '미(美)의 화신'이었다. 사진기자들은 테일러의 얼굴이 완벽한 좌우대칭이라고 말했다. 밉게 보이는 각도(bad angle)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어제 영화 사이트 톱텐츠넷이 뽑은 '가장 눈이 아름다운 여배우' 10명 중에 테일러는 4등이었다. '숨 막히도록 예쁜' 인도 배우 아이슈와리아 라이가 1위, 앤젤리나 졸리가 2위, 헵번이 5위다. '1930년대 이후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에서도 40년대 섹시 스타 리타 헤이워스가 1위, 테일러는 6등이다. 무비폰블로그가 매긴 할리우드 최고 여배우 30명에선 테일러가 11번째로 올랐다. 무비메이든스가 1950년대 스타만 별도로 집계한 데에선 테일러-먼로-켈리-헵번 순이었다.

 

 

                                                  에리자 베스 말년의 표정은 마지막 인사을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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